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미키 다케오 (문단 편집) == 평가 == 총리 재임시절에는 정치자금규제법과 공직선거법 개정 등 정치개혁을 주도하였으며 또한 일소관계 개선과 아시아 태평양 평화체제 구축[* 대표적으로 방위예산은 GDP 대비 1%를 넘기면 안된다는 1% 원칙을 처음 제시했다.], 배기가스 규제 등 당시로서는 상당히 리버럴한 정책을 펼쳤기 때문에 중도 성향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. 또한 자유민주당 주류와 뜻을 달리함을 분명히 하여 소수파벌을 이끌고 정치판 한 가운데서 파격적인 발언과 구상으로 파란을 일으켜 당시 정계의 화약고로 꼽혔다. 당시 기자들은 유럽의 화약고였던 [[발칸 반도]]에 빗대 미키를 '''발칸 정치인'''이라고 조롱하며 야유했으나 즉흥적인 제스처로 정국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끄는 노련함을 보여 다나카마저도 '''정치의 프로는 나(다나카)와 미키뿐'''이라며 극찬하기도 한다[* 사실 이는 다나카와 미키 모두 일본정치에서 있어서 당인파(黨人派), 즉 관료 출신이 아닌 평당원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국회의원에 다수 당선된 정치가였기에 나온 말이다. 다나카와 미키가 왕성한 정치활동을 하던 당시 일본의 보수정계의 주류는 [[요시다 시게루]]를 시초로 하는, 관료로서 장기간 근무하고 국회의원이 되는 관료파 정치였다.][* 다만 다나카는 당인으로써의 정체성보다 요시다 시게루-이케다 하야토-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는 이른바 [[보수본류]]로써의 정체성이 더 강하였으며 다니카 본인은 자신의 계보에 대하여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.] 그러나 비판도 없지는 않다. 다나카를 구속시킨 뒤 자민당 내 거의 모든 계파들이 反미키 운동에 동참했을 때 '''차라리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했다면 어땠을까?'''라는 비판이다. 비교가 되는 사례가 후에 [[고이즈미 준이치로]]가 재임기간 중에 우정개혁을 밀어붙여 당내반발이 생기자 의회 해산 및 선거로 당내 반대세력을 일소하고 개혁조치를 성공한 것.[* 고이즈미는 초선의원 시절 미키 끌어내리기의 움직임을 보고 느끼는 바가 있어 이런 식의 공작을 펼쳤다고 한다.] 만약 다나카 구속 → 전 계파의 미키 끌어내리기 공작 → [[의회해산]] 및 선거 크리로 갔다만 설령 '''다나카 개인은 당선되더라도 다나카파나 다나카를 편든 계파들이 전부 붕괴했을''' 개연성도 있다는 지적이 있다. 물론 이렇게 될 경우에는 자민당 일당체제 종식이 훨씬 일찍 이루어지고 [[번촌정책연구소]]+[[일본사회당(1945년)|일본사회당]], [[공명당]], [[민사당]], [[신자유클럽]], [[사회민주연합]] 같은 비 다나카파 연립정권이 17년 일찍 등장했을것이다. 이런 비판에 대해서 미키는 '''의회 해산이 헌법에 맞는지 마뜩지 않았다'''라고 후에 진술한 바 있다. 다시 말해서 정략적인 목적을 위해서 헌법 정신을 흔들면서까지 의회를 해산하고 선거를 치르고 싶지는 않았다는 이야기[* 또한 미키 퇴진을 주장하던 의원들 중에서도 대원로급인 호리 시게루는 '''미키를 끌어내려다가 자민당이 분당되는 것은 절대 일어나서는 안될 일'''이라고 주장하면서 퇴진운동 강경화에 제동을 걸었다. 호리 자신이 자유당에서 민주당으로 분당할 때 가담했다가 선거 및 당 운영 등에서 고생했었고, 또한 1959년에 제1야당인 [[일본사회당(1945년)|일본사회당]]에서 [[민사당]]이 분당 된 이래로 두 정당 모두 재통합(158석), 분당(40석) 당시의 의석수를 회복하지 못하는 사례를 바로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이다. 즉, 지지율이 떨어지더라도 정권유지가 가능한데 굳이 모험을 감수해야할 필요가 없던 것이었다. 다음에는 호리에게 신세진 후쿠다까지 이 주장에 동조하자 퇴진운동의 기세가 줄어듦도 미키가 분당을 결심하지 않은 요인이 되었다. 더군다나 '''미키가 분당의 조짐을 보인 것은 실은 퇴진운동의 김을 빼기 위한 제스처'''로 보는 의견도 많이 존재하는 편.]. 그의 헌법주의자이자 의회주의자로서 면모가 드러나는 부분으로 '''이런 케이스는 일본 역사에 유일하다.''' 그 덕분에 제33대 중의원 의원들은 전후 일본 역사에서 처음으로 4년 임기를 꽉 채웠다.[* 이후 제48회 중의원 의원들이 임기 만료 1주일 전까지 재직하며 사실상 임기를 다 채웠다. 이는 [[2021년 자유민주당 총재 선거]] 일정 때문에 매우 늦게 중의원 해산이 이루어졌다. 이 때문에 제48회 중의원의 임기만료 후에 [[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]]를 치렀다.] 하지만 결말은 자민당의 참패. 반면 [[고이즈미 준이치로]] 총리가 우정개혁을 두고 당내 반발이 있자 의회해산과 선거 실시로 맞섬도 이 당시 정치 신인으로 "미키 내림"의 움직임을 보고 반면교사로 체득한 것이라고 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